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한여름의 판타지아, 누군가의 여름 조각들

by easyant 2024. 6. 11.
반응형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1.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흥얼거리는 멜로디 같은

 일본 지방 소도시 고조. 영화감독인 태훈은 이곳에서 새로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취재차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 살고 있는, 일하고 있는 사람들과 인터뷰하며, 사람들은 고조와 관련된 기억을 꺼낸다. 더운 여름날, 걷고 인터뷰하고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다. 고조는 조용한 곳이다. 수십 년 전에 사람들은 도시로 많이 떠났고, 이곳에 남은 사람들은 때로 활발했던 그때의 고조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인터뷰 대상은 공무원, 동네에 오래 살았던 주민, 카페 사장님, 할머니, 어머니를 돌보는 중년의 남성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한여름의 눈부신 색채가 빠진, 흑백 화면으로 진행이 된다. 그럼에도 뜨거운 햇살과 선선한 새벽 공기, 카페나 식당의 먼지 냄새와 음식 냄새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하다. 대화와 대화 사이가 드라마처럼 주고받듯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지루하지 않다. 일상의 대화들은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는 대화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 툭 하고 두서없이 내뱉은 말들도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기억은 완벽하지 않고, 왜곡이 심하다고 한다. 현재 자신의 상황과 정서에 맞게 기억과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고조시의 사람들의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 번영했던 과거의 시대, 가족들과의 추억 같은 것들. 고요한 이 소도시의 한적함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소란스러운 도시를 벗어난 이 한적한 소도시는 시간도 공간도 넉넉하다.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을 그리워하기 좋을지도 모른다. 


2. 한순간 화려함을 드러내며 사라지고 마는 불꽃놀이 같은

 이 마을을 떠나기 전, 태훈은 방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불꽃은 알록달록 하늘에 새겨진다. 새겨지고, 얼마 안 가 사라진다. 화면이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간 장면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고 넌지시 알려주는 듯하다. 

 여름은 소란스럽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동안, 움츠려 있던 봄은 시간이 서서히 지나 기지개를 켠다. 완전히 따뜻해지면서,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여름이 다가온다. 여름은 빠르다. 푹 젖어있던 빨래도 금방 마를 정도로 덥고, 따뜻한 컵에 담긴 음료도 금방 식게 만든다. 더운 공기를 식히기 위해 빠르게 뛰어야 한다. 청춘을 여름이라는 계절로 빗대어 표현하는 이유는 온도 변화만큼이나 마음에서 생기는 미묘한 공기마저 데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 온도 변화를 견딜 수 있는 감정과 체력이 있기에 아마 다들 그렇게 계절이 빗대었나 싶다. 

 혜정은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다. 북적한 도시에서 고조까지 왔다. 무언가를 만들며, 무언가를 찾기 위한 혜정은 청년 유스케를 만나 동행한다. 고조의 골목들을 돌아다니며,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유스케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 자신이 이곳에서 하는 일과 같은 사소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3. 누군가의 여름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는 듯한

 혜정과 유스케가 만나게 된 시간은 짧았다. 아마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게 된 이유도, 얼마 안 가 다른 세상을 살아가게 될 사람이라는 예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품어줄 나와는 곧 헤어질 사람. 

 불꽃놀이가 있던 밤, 혜정은 여행을 마무리하려 한다. 마지막 불꽃놀이는 두 사람이 함께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북적거리는 불꽃놀이 장소에서 홀로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방 안에서 불꽃놀이를 바라본다. 아름다웠던 이 여름도, 이 기억도, 이 순간도 마치 다 지나갈 거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누군가의 여름을 오랜 시간 지켜본 것 같았다. 영화의 여름은 푸른 하늘, 녹색 나뭇잎이 찰랑거리는 풍경 말고도 다양한 색채를 보여준다. 사람들의 인터뷰는 스케치로, 이야기는 그 위에 수채화를 덧입혀 놓았다. 여름의 색은 투명하면서 선명했다. 

 불꽃놀이는 영원히 지속될 듯 아름답고, 보란 듯이 소란스럽다. 여름은 그렇게 또 소란스럽게 지나가겠지만, 그중 누군가와 행복한 기억으로 함께했던 여름이 최고의 여름일 것이다. 훗날 힘들 때 꺼내먹을 수 있는 기억이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