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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정원, 말이 아닌 마음으로 전할 수 있는 것

by easyant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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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어의 정원>

1. 비 오는 날, 도심 정원에서

 비가 오는 날, 다카오는 정원으로 간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이런 날은 학교로 곧장 가지 않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어느 공간에서는 희미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니까. 소년이 좋아하는 일은 구두를 디자인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 마음을 간직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도심의 정원에는 직장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다. 다른 직장인들이 출근하느라 바쁠 시간에 한가하게 정원이라니.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는다. 아마 본인만의 사정이 있겠지.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직장인과 학생들의 모습과는 딴판이다. 

 이들은 긴말이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존재를 애써 의식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 비 오는 날 정원에서 만나는 일은 무언의 약속이 되었다. 


2.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주니까

 다카오는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선물한 구두를 시작으로, 구두 디자이너에 대한 꿈을 키웠을 것이다. 어머니가 구두 상자를 열고 행복해하던 그 순간의 기쁨이 아마 꿈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이런 말이 있다. '좋은 신발은 좋은 곳으로 데려다준다'. 새로운 신발을 하나 장만하게 되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나의 인생에 바뀐 것은 신발 하나뿐이고, 그 신발을 신고 갈 곳은 매일 가던 곳일 텐데도 말이다. 그 기분은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구두 디자이너가 되면 개개인의 행복한 순간을 자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구두는 문을 열고 나가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하루를 응원한다. 


 구두는 상대방이 좋은 곳으로 훨훨 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선물이다. 선물 받은 사람은 그 다정한 마음을 받고서 조금 더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또각또각하는 소리, 바닥과 맞닿은 발바닥의 촉감 같은 것들이 온전히 스스로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비록 그것이 비록 견디기 힘든 일일지라도, 현실에 발을 붙이게 도와준다. 


영화 <언어의 정원>

3. 빗소리가 가득한 날의 정원

 비가 내리는 날의 정원은 말소리가 아닌 빗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도심 정원의 원래 주인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 사람은 그저 풍경을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시끄러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역할을 한다. 
 
 빗소리는 어느 순간 다르게 들린다. 슬픈 눈물 자국, 울먹이며 흐느끼는 소리, 숨죽여 속상함을 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다. 백 마디 말로 내 상황과 감정을 터놓는 것보다, 조용히 숨죽여 내 상태와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이 더 소란스럽다. 

 다카오는 무언의 약속을 함께하는 이 여인에게 구두를 만들어 주기로 한다. 덤덤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시끄러운 일이 벌어지는 이 사람을 위한 구두를. 아침부터 맥주와 초콜릿을 먹거나, 책을 읽는 이 여인에게. 이 여인의 이름은 유키노. 다카오에게 구두 디자인과 관련된 책을 선물한다. 조용히 꿈을 응원한다. 허황한 꿈이라 말하지 않고, 꿈을 위해 정진하라는 조언도 하지 않는다. 섣부름이 없는 응원이다. 

 때로는 이런 응원을 누군가로부터 받고 싶지 않은가. 꿈을 향해가는 길은 외롭기 마련이니, 조용히 옆에 있어 주며 나의 표정을 살펴봐 주는 이의 응원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 때로는 가족도 친구도 한 발 앞서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아, 꿈을 향해가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일이 잦기도 하니까.

 유키노는 다카오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님이었고, 학교에서 생긴 사건으로 인해 불안감으로 출근을 주저하던 사람이었다. 이 사실을 말하게 돼버리면 빗소리가 가득한 정원에서의 소란스러운 고요함은 깨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유키노는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학교를 떠나게 되고, 다카오는 소란스러운 여름을 기억하며 유키노를 위한 구두를 선물한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감을 마음에 품고 속상하기보다, 그 어떤 시작이라도 좋으니 꿋꿋하게 일어나 걸어갈 수 있기를 응원한다. 속도를 내서 달리기보다, 천천히 본인만의 속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그보다 먼저, 깊은 마음의 상처로부터 빠져나와 현실에 발끝을 내디딜 용기를 낼 수 있기를.

 꿈으로만 살아갈 수 없지만, 살아가는 데에 꿈은 연료가 될 수 있다. 한순간에 불태워 사라질 꿈보다는, 어쩌면 하루하루 에너지를 끌어내서 살아갈 힘을 마련해 내는 스스로에 대한 응원이 필요하다.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고, 아끼며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현실에 발 디디게 해 준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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