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드라마, 영화의 설정이 클리셰일 경우 관객들은 진부하다고 느낀다. 이미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와 대사들이 넘실거리며 현재의 시청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진부함을 견디면서까지 그러한 드라마나 영화를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이른바 고전이라 칭하는 명작을 다시 보기 어려운 이유는 시대상과 맞지 않아서거나 진부함을 외면하고 싶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작은 화면 속에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눈을 돌릴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말괄량이 견습 수녀와 엄격하고 무뚝뚝한 폰 트랩 대령, 그리고 폰 트랩 가의 아이들이다. 자극과 폭력이 만연한 영화들 사이에서 유독 이 영화가 빛나는 이유는 하나다. 눈살 찌푸리게 되는 장면 하나 없이 음악을 흥얼거리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 때문이다. 아마 음악과 아름다운 배경, 혐오와 조롱거리가 없는 소소한 유머가 담긴 대사는 이른바 N 회차 감상하도록 돕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2. 만남과 이별
폰 트랩가 아이들과 마리아의 만남은 심상치 않았다. 규율과 규칙이 있는 집안에서 아이들은 일과대로 움직였다. 아이들은 장난꾸러기였으며, 자신들을 돌보는 가정교사들을 괴롭히기도 한다. 마리아와 아이들과의 만남은 짓궃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는 표현 방식이 그저 서툴렀다. 그 서툰 표현 방식을 음악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마리아가 해낸다. 폰 트랩과 결혼을 약속한 엘사는 오스트리아 합병 건을 계기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별한다. 엘사는 전 남편으로부터 부와 명예를 상속받아 어쩌면 안전하고 미래를 약속하기에 적당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 사랑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엘사가 폰 트랩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안전과 안식처였을 것이다. 군인 출신인 데다가, 이미 한 번 가정을 이룬 경험이 있는 적격자인 셈이다. 폰 트랩은 자기 자신과 더불어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사랑했다. 엘사의 등장으로 인해 마리아와 아이들은 이별하게 되고, 자신의 마음을 자각한 마리아와 폰 트랩은 결혼하게 된다.
첫째 딸 리즈의 사랑은 아름다운 결말을 맞지 못한다. 시대적인 배경이 세계 2차대전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찬란한 맹세를 했던 지난날의 고백은 암울한 시대 속에서 부서졌다. 그 소년은 운명에 순응하는 겁쟁이였다. 누군가를 지킬 수도, 죽일 수도 없는 연약한 존재였다.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라면, 리즈는 아마 실연의 상처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실연을 응시하기에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당장의 생존 문제가 그들 가족에게 닥쳤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수녀님들의 관계도 인상적이다. 사고뭉치인 데다가 수녀원 내 규율과 법도를 어기는 마리아는 수녀들에게는 숙제로 남아있다. 자유분방함, 솔직함은 수녀원에서는 자제해야 할 덕목이지만, 사회에서는 필요한 능력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누구도 해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사람을 대하는 마리아의 행동으로 인해 세상에 더 밝은 빛으로 퍼져나가길 누구보다 수녀님들이 기도했을 것이다.
3. 환갑이 가까운 나이의 영화가 전혀 촌스럽지 않은 이유
음악, 드라마, 소설, 영화와 같은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음악이라면 그 당시 유행했던 흐름에 맞춰졌거나, 드라마와 영화라면 패션이나 말투 같은 것들이, 소설이라면 문체나 사용되는 단어들로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 당시와 현 상황에 큰 간극이 발생하였을 때 가장 크게 다가온다. 사운드 오브 뮤직은 현재 상황에도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고, 이 상황을 버텨내고 이겨내게 만드는 큰 원동력은 다정함과 흥얼거릴 수 있는 음악에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의 첫 장면의 마리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가족들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필요했던 것은 비굴해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약해지지 않고, 나를 버티게 해 줄 누군가가 있다면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