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터전, 나의 둥지, 나의 가족
비바리움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은 다음과 같다. 커다란 직사각형 박스 모양의 투명한 수족관이나 이끼와 조형물 등이 있는 투명한 유리구슬들이 바로 그것이다. 동식물로 하여금 적절하고 일정한 공간과 환경 등을 제공하고, 연구나 관찰을 하기 위한 인공적인 공간을 말한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살게 되는 공간 역시, 비바리움이다. 아름다운 색채와 평온한 배경을 둘러싸고, 어딘가 기괴하고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입구와 출구가 없는 미로와도 같다. 어느 곳으로 탈출하건 간에, 자신들의 9호 집으로 오게 된다. 이 공간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다. 어느 날 문 앞에 아기가 있었고, 그 아기는 박스 안에 있었다. 그 아기를 키우면 탈출할 수 있다. 온전하게 탈출을 할 수 있을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다. 이 제한된 환경에서, 아이는 톰과 젬마의 말과 행동을 따라 한다. 인간은 유전적인 영향 말고도, 사회적인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받는다. 폐쇄되고, 사회와 단절되어 있는 환경에서 이 가족은 불안정하고 반복되는 매일을 살아간다.
2. 나를 위험하게 만드는 나의 안식처
가족과 가정에 대한 정의는 헛되게 다가온다.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고, 생활 속에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사는 것이 가정의 정의이다. 산만하고 정신 사나운 생활에 지치더라도, 완전히 내가 살고 있는 터전을 등지고 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외로움 때문이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는 안전과 행복, 평온함을 누릴 자격이 있다. 안전한 공간에서라야 온전해질 수 있다. 8호 집은 이와는 다르다. 벽과 지붕이 있지만, 어떠한 위험과 공포가 깃드는 것 같다. 예측 가능한 것은 오직, 함부로 예측하려 하면 안 된다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그저 피실험자로서 어떠한 실험이나 연구결과를 위해 반복적인 생활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상자 안의 아이를 기르기 위해 톰은 땅을 파는 것에 집착을 하고, 젬마는 아이를 돌본다. 그렇게 남편은 가정을 위해 결과 없는 일을 하다가 죽고, 아내는 밖에 나가지도 못한 채 아이만을 돌보다 지친다. 아이는 성인이 된다. 아이는 마틴이 되기 위해 길러졌고, 마틴은 정형화된 형태의 존재로 성장한다. 마치 공장에서 생산 및 제작, 조립되어 만들어진 기성품 같다. 마틴을 만들기 위해, 이 불행한 안식처를 제공하는 일이 계속될 것만 같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한 공간에서 일을 하다가 죽는 마틴을, 새로운 마틴이 시체 보관함에 넣고 어디론가 보내는 모습에서 상품이 반송되는 과정이 그려졌다. 그렇게 마틴은 새로운 마틴을 길러줄 엄마를 찾는다. 톰이 일을 하고, 젬마가 아이들 돌보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그 행위의 무용함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고 종래에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환경에서 도대체 어떤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을까. 탈출이라는 명분은 미끼에 불과했다. 이 현실에서 벗어난다 한들, 비바리움을 벗어난 현실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행위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3. 완전히 비현실적이지만은 않은 공간
영화가 시작하는 장면에서 뻐꾸기가 원래 살고 있던 아기 새와 알을 내쫓고,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기 새끼인 줄 착각하는 새는 뻐꾸기를 정성스럽게 기른다. 이 뻐꾸기는 자라서 같은 행동을 반복할 것이다. 원래 일상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의 공간을 빼앗고, 당신의 새끼인 양 행세를 한다. 뻐꾸기는 둥지를 훔치고, 어미를 훔쳤다. 그 둥지는 더 이상 그 새의 보금자리가 아니다. 원래 주인을 내쫓아 죽여버리고, 도태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톰과 젬마의 둥지는 바로 일관성 있는 디자인의 아무도 살지 않는 이 마을 안에 있다. 아이에게 부부의 존재는 오직 생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죽음을 맞이한 원래 집주인들은 땅에 묻히고 만다. 톰은 이곳에서 우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박스에 배송되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 음식과 생필품, 소통할 상대는 오직 커플뿐인 이곳에서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매슬로의 욕구이론에서 생존과 외부 위협으로부터의 안전만 보장된 이 공간에서, 그 이상의 욕구는 차단되고 제한된다. 다음 단계의 욕구에 이르면, 인간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뻐꾸기가 있다면, 이 뻐꾸기는 나의 본모습을 쫓아내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래 나의 모습은 죽어버리고, 뻐꾸기가 원래 내 모습인 양 행세하는 중일 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슬프다. 생존과 안전이 보장되어 있으니, 이대로 만족하며 살라는 뻐꾸기의 속삭임을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이곳에서는 꿈을 꿀 수가 없다. 미래를 그릴 수 없고, 도망칠 수도 없이 한 공간에서 체념해버리고 마는 과정은 가히 현실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