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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생존을 위한 분노

by easyant 202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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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1.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다면'과 같은 질문 속에는, 당신은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 극한의 가정을 첨가한 영화가 있다. 핵전쟁과 자원 전쟁으로 멸망한 22세기를 보여준다. 인간의 본능 중 그 어떤 것도 생존을 넘어서는 가치를 가진 것은 없다. 생존을 갈망한다는 것은 나의 가치와 자아실현을 위한 발판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그리고, 임모탄처럼 무력해진 인간들을 인질 삼아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이도 생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권력은 권력으로만 남지 않고, 종교가 된다. 오직 믿을 건, 가끔 물을 내려주는 임모탄뿐이다. 그가 있기에 이만큼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게 된다. 인간은 초라해지고, 구차해진다. 이마저도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 무릎을 꿇는다.


 생존하기 위해서 시타델의 시민들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고 복종한다. 자신들이 임모탄의 권력 유지 수단이 된 사실은 깨닫지 못한 채로.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은 순응과 복종이 전부였을까. 퓨리오사의 등장으로 생존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린다. 퓨리오사의 이름 그대로 '분노' 그 자체가 살아남기 위한 연료로 사용된다. 임모탄의 여인들은 세상이 멸망한 이유와 동시에 자신들은 물건이 아님을 외친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퓨리오사는 생명의 땅으로 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2. 분노가 연료가 되어버린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된 흐름은 생존을 위한 전력 질주다. 임모탄이 지배하는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도구로 존재하는 인간들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임모탄이 지배하는 도시, 시타델을 떠나 도망친 이유는 희망 때문이다. 더 나은 곳에서, 더 나은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함이다. 마침내 서쪽까지 내달린 그들은 지원군을 만난다. 퓨리오사의 어머니들이다. 그들은 이미 오염되고 메말라 버린 풍요의 땅에서 도망한 상태였다. 험난하고 위험한 곳으로부터 도망쳐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오아시스였다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맥스는 시타델로 복귀를 제안한다. 임모탄의 도시는 이미 풍요로운 곳이었다. 오직 그만이 권력의 유지를 위해 자원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생존을 위한 질주를 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나와 나의 사람들 생존이 아닌 우리의 생존과 구원을 위한 전환점이다. 


 워보이로 태어난 눅스는 임모탄의 맹목적인 추종자이다. 그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시타델의 모든 존재는 괴이하고, 잔인한, 전쟁 노예들이다. 끊기지 않고 늘어져 있던 쇠사슬이 끊긴 순간, 눅스는 임모탄을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존재로부터 벗어났다. 눅스를 걱정하고 응시하는 존재가 생기자,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한 것처럼 탈출하는 이들을 돕는다.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자 임모탄이 아직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줄 변화는 척박한 사막에서 적어도 물로 인해 죽음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아직 분노는 꺼지지 말아야 한다.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3. 다 타버린 분노 뒤에는 무엇이 남을 것인가

 시타델에 돌아온 퓨리오사, 풍요의 땅에서 온 여인들, 임모탄의 여인들, 그리고 맥스는 임모탄의 죽음을 알린다. 그의 죽음은 그저 초원에 내던져진 고깃덩어리와도 같다. 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애도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들은 달려들고, 임모탄의 자식들은 겁에 질릴 뿐이다. 분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저 현 상태의 유지만 계속될 뿐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행의 끈을 손에 계속 쥔 채 말이다. 


 분노의 끝에는 다행히 희망이 있었고, 그 너머 구원이 있었다. 새로운 고통은 다시 싹틀 것이다. 인간이란 죽음이 목전에 있어도 끝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해도 폐허를 기회로 삼아 권력을 잡는 이들이 나타난 것처럼. 영화의 마지막처럼 권력이 전복된 역사가 생긴다면, 아마도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그 누가 나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지배하려 한다면, 분노의 힘으로 희망을 되찾으라는 메시지가 각인될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만, 영원한 승자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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