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확률이 내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면,
과학 기술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동안, 영화나 문학은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다. 물론 자본은 긍정적으로 연구를 지원하고, 부정적으로 돈을 끌어모은다. 모두를 위한 유토피아는 곧 디스토피아일 것이라는 말이 있다. 특정 질병을 가지게 될 확률, 키와 몸무게, 직업, 성격, 범죄자가 될 가능성 등은 사람이 태어나기 전에 결정된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수많은 '만약' 속에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능력치라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이르게 된다. 어떤 이는 선천적인 재능과 외모 등을 신이 본인에게 준 선물이라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타고난 것을 극복하고자 금전적인 투자나 정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영화 속, 이 미래 사회는 효율적인 사회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개인이 인지하고, 세상에서의 나의 존재를 파악하기 이전에 유전자에 들어가 있는 확률은 이미 개인의 존재를 정의한다. 간단하고, 간편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타고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이대로 살아갈 아이의 인생은 곧 부모에게 달려있다. 확률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미래는 정해져 있으니, 현재는 정해진 대로 살아가야 한다. 희망의 가능성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박탈이 시작되었다.
2. 선택받지 못한 존재
빈센트는 우월한 유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성장하면서 우주로 가고자 하는 그의 꿈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한 조건을 획득하지 못했다. 결국 유진의 우성 유전자만 있으면, 빈센트는 꿈을 이룰 수 있다. 그의 행동이 칭찬받을 만한 것이 아님에도, 빈센트를 응원하게 되는 이유가 있다. 빈센트는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선택은 반항심과 즐거움을 목적으로 피라미드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꿈을 이루고자 하는 가능성이 배제된 한 사람의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 같은 것이었다. 사회는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꿈마저 박탈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으로 막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이 체념과 포기가 각인된 채 살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빈센트와 유진의 거래가 합법적이고, 용인이 가능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3. 운명을 거부하는, 외면하는
우월한 유전자를 골라 아이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 시대에서 우성인자는 곧 생계와 계급의 격차를 만들어 낸다. 완전한 사람만이 완전한 인생을 살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런 삶의 구도를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용납이 되는 사회이다. 영화의 내용은 결코 희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빈센트와 유진의 거래는 성공했고, 한 사람은 토성으로 갈 수 있었다. 평범하고 질병 인자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우주로 가고, 그에게 신분을 매매하고 죽음을 선택한 다른 인물은 인간 자체에 대한 질문을 남긴 채 사라졌다. 인간이 완벽함과 완전함을 추구할수록, 행복에 가까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완벽에 대한 강박이 인간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더 빠르고, 더 완벽하게, 더 강하게 되고자 노력하는 것은 생존 본능의 일종이다. 하지만 이 본능은 인간이 느리고 불완전하며 약한 존재라는 것을 역설적이게도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야 만다. 우월한 특성에 따라 권한을 부여하고, 그 외의 것들은 배제하는 세상에서 평범하고 열등한 특성을 가진 것들을 배제한 채 이루어 낸 성과와 혁신은 인간의 욕심으로 지어진 바빌론의 탑과도 같다. 호모 사피엔스 종이 살아남은 이유는 가장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불완전한 존재끼리의 협력으로 인해, 현재까지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은 다소 무겁게 느껴진다. 국가나 사회가 지정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라면, 과연 멋진 신세계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